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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아버지

아버지는 돌아가실 무렵 뉴저지 저지시티에서 살았다. 항상 하얀 옷을 즐겨 입으셨다. 신발도 하얀 구두에 모자도 하얀색이다. 말할 것도 없이 속옷도 하얀색이며 검은색이나 유채색 옷은 없다. 참으로 백의민족의 표상 같으신 분이었다.   돌아가시는 날에 친구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시고 바둑을 두시러 가셨다고 한다. 바둑을 두시는 중에 장고에 들어가시면서 조용히 쓰러지셨다. 아버지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저지시티 메디컬 빌딩으로 달려가 보았다. 소중히 입으시던 하얀 양복은 갈기갈기 가위질이 되어 있었다.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위급했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차갑게 식어가는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셨다. 82년의 생애가 이렇게 끝나는구나 생각하니 인생이 너무나 허무했다.   당시 문상오신 친구분들은 “좋아하시던 하얀 양복을 입으시고 바둑 두시다가 아무런 고통 없이 돌아가셨으니 이보다 더 좋은 호상이 어디 있겠냐” 하셨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아쉽고 잘못한 것들이 한둘이 아녔다. 아버지와 함께 여행 가지 못한 것, 바둑 한 수 물려주지 않고 싸운 것, 중요한 말씀에 경청하지 않은 것에 후회된다. 좋아하시는 하얀색 양복 한 벌 사드리지 못한 것과 용돈 한 번 풍족하게 드리지 못한 것에도 자책하며 울어야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East Honover, Rest Land에 장사를 지냈다. 삶이 고달플 때 가끔 꽃 한 묶음사 들고 산소에 간다. 묘지에 꽃을 놓고 가난하고 어려웠던 날들을 생각해 본다. 전쟁 난리 중에 죽느냐 사느냐에 피난 다녔던 아버지는 두 번의 상처를 했다. 배우자의 사망은 견디기 어려운 충격이었을 텐데 그것도 두 번이나 겪어야 했다. 어느 뜨거운 여름날에는 앙상하게 뼈만 남은 몸으로 도로 공사판에서 구슬땀을 흘리셨다. 가족들을 위해 고달픈 소처럼 일하신 아버지가 계셨기에 우리는 가난의 통로를 빠져 나올 수 있었다.   평소 시간이 날 때마다 우리에게 하신 말씀은 “좋은 말로 가르치라. 매 열대보다 칭찬 한마디가 더 좋은 것이다.” “자세를 바르게 하라. 자세가 바르지 못하면 품위에도, 건강에도 안 좋다.” “가정이 편해야 모든 일이 잘된다.” “너희 형제와 서로 돕고 지내라.” “쓸데없는 일에 시간 쓰지 말라.” “좋은 친구와 사귀라.” “아침 일찍 일어나고 부지런하라”고 가르치셨다. 당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린 모두 평범한 말씀이지만 우리 형제자매들의 성격 형성에 알게 모르게 도움이 되었다.   평소에 아버지는 걱정 근심을 마음에 담아 두지 못하셨다. 가능한 한 빨리 털어버리고 마음에 평안을 유지하려 애쓰셨다. 붓글씨로 마음을 수련하시기도 했고 때로는 춘향가나 심청전의 창을 하셨다. 가야금 산조에 맞추어 빠른 템포의 춤을 추시기도 한 멋있는 분이셨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버지는 서예가셨다. 추석 잔칫날 노래자랑 대회에서 일등상을 탄 가수였다. 수학 선생님이시기도 하고 무용가셨다. 그리고 하얀 양복과 모자, 하얀 구두를 신고 저지시티 거리를  활보하신 패션모델이기도 하셨다.   나는 “아버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해 본 적이 없다. 자녀에게 교육과 생계를 위해 당연히 일하는 분이 아버지라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효도와는 거리가 먼 아들이다. 아버지가 되어 살아온 지금은 아버지라는 직업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실감한다. 쉬고 싶어도 쉴 수 없는 생활을 해야 하며, 울고 싶어도 함부로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 가족의 안전과 생계에는 무한대의 책임을 지고 있다. 이것이 아버지다.   이번 주에는 아버지 산소에 가고 싶다. 장미와 나리꽃도 준비해야겠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아버님 아들로서 부끄럼 없이 살아가겠습니다” 하며 어려운 시기에 우리를 위해 희생하신 아버님의 지난날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려야겠다. 이준 / 뉴저지삶의 뜨락에서 아버지 아버지 산소 저지시티 거리 양복과 모자

2023-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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